다들 부모가 처음이다
나도 자식이 처음이지만 부모님 역시 그러하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런데 이유가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황당할 지경이다. 아니 너무 어이 없어서 내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을 정도다. 나는 유독 다른 사람의 정서나 감정에 공감을 잘 하지는 못 하는 편인데 그로 인해 친구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연기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 건 비록 최근으로 이런 나의 태도를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누구와도 깊은 감정적인 관계를 가지지는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누군가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건 너무나 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재미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아무리 친한 지인이라고 해도 그들의 고민에 항상 깊이 공감하고 참을성 있게 들어 주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나는 그들에게 크게 관심이 없었다.
내가 관심이 가는 사람들은 그들의 옷에 묻은 먼지에도 관심이 가는 걸 보면서 도대체 지난 관계는 무엇이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연인 사이만이 아니라 친구 사이도 어느 정도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그게 꼭 육체적인 관계로 이어질 필요가 없는 관계라고 할지라도 어느 정도 궁금한 사람과 관계가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법이다.
내가 어린 시절 울면서 부모를 원망한 건 근본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부모님 자체가 싫다기 보다는 이들의 가난이 나에게까지 물들어 버리는 현실 앞에서 어린 시절 나는 좌절했다.
나는 그림이나 음악에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다.
먹고 살 만한 재능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누가 봐도 재능이 있다고 할만한 수준은 되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이런 나를 지지해줄 만한 경제력이 전혀 없었다. 그로 인해 나는 재미도 없는 공부를 하게 되었고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 편이라 공부도 그럭저럭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나름 괜찮은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긴 했다.
그래도 가난의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다.
지금도 넉넉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내가 울면서 부모님과 기싸움을 한 적이 한 번 있는데 그건 바로 필통 때문이었다. 멀쩡한 필통을 놔두고 새로운 필통을 어떻게든 사고 싶었던 나였기에 울면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기에 내가 몇 시간이고 울면서 조용한 시위를 시작하자 결국 포기하고 나의 손에 돈을 들려 주셨다.
그 당시 문구점에 들어가서 신나게 구입한 필통이 어떠한 모양이나 색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모든 걸 체념하면서 나에게 돈을 건넨 어머니의 허탈한 표정만이 기억에 남는다.
필통을 사서 기뻤을까?
전혀 아니었다.
나는 그냥 부모님과 기싸움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20대가 넘어서도 부모가 경제력이 없다면 자녀를 낳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성인이 되어도 그렇게 성숙한 인간이 되지는 못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보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서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모와 저 정도로 기싸움을 할 만한 자녀가 과연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녀를 키워 보신 분들은 알게 모르게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아마 우리 부모님 역시 지금까지도 내 걱정을 하며 하루를 보내실 게 뻔하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는 다양한 부모들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부모가 아예 없는 경우도 나온다. 가출 청소년들이 그러하다. 부모가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자녀에게는 아예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다. 나는 가출 청소년들을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나름 안전하게 자라온 편인데 부모가 없는 미성년자 시절을 그래서 상상하기 어렵다.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부모는 없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보호막이 없는 미성년자는 보다 안 좋은 어른이나 동년배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뿐이다. 가출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서 주목조차 받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자녀는 소유물일까?
부모는 자녀의 어디까지 간섭을 해야 할까?
어디까지 알려줘야 할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는 그저 공허한 외침이었나.
잘 모르겠다. 내가 부모가 아직 아니어서 이해를 못 하는 걸 수도 있긴 하지만 나는 아마 죽기 직전까지도 이해를 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지금에 와서는 우리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우리 부모님도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고 살면서 실수도 사고도 많이 치신 분들이지만 적어도 그 안에 악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다 나를 위한 길을 열어주신 분들이다.
그리고 딱히 나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었다. 내가 완벽하게 자라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탓이지 부모의 탓이 아니라는 걸 나는 나이가 먹으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부모도 아이도 같이 성장한다. 부모들이 하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이 갑의 입장에서 자녀에게 무조건적인 영향을 미치고 판단을 해야 한다고 착각하는 건데 아이도 사람이고 초등학교만 다녀도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사고할 줄 안다.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지 말고 자녀와 상의해 보고 이야기해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가끔은 자녀가 부모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서로와 대화를 좀 하자.
참 쉬우면서도 그 대화라는 게 참 어렵다.
나도 안다.
그래도 해야 한다. 대화가 없으면 상대방의 마음을 알기 어렵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조차 하기 어렵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말 안 해도 부모가 내 마음을 의례히 알아주기 바라는 거 자체가 모순이다. 입은 음식을 넣기 위한 기능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를 하라고 신이 만들어 놓은 거다.
자녀의 입장도 부모의 입장도 서로 들어가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말 안 해도 서로 알아주겠지 라는 건 대단한 착각이다.
태수와 하빈이 대화만 자주 나눴다면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났을까.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불안하고 유리처럼 깨질 거 같아서 대화로 전혀 해결이 안 될 때가 진정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 때다.
제발 집안에서 가족끼리 말 좀 하고 사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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