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만 나와서 더 좋다
웹툰 정년이를 전혀 안 본 상태에서 보기 시작했다.그래서 그런지 초기 웹툰 골수팬들이 비판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원작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수 있기는 한데 만화와 드라마는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실사화가 항상 망하는 게 바로 만화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기 때문인데 우리 나라는 그래도 각색의 여지가 충분해서 그런지 영상화에 성공한 웹툰들이 굉장히 많다.
정년이 역시 초기부터 기대를 많이 모은 작품인 데다가 배우들의 열연으로 역시나 화제성과 시청률을 동시에 잡고 있다. 특히 1950년대 배경의 여성 국극이라는 소재여서 중장년층들로부터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시청률은 13%를 돌파했다.
시청률이 전부는 아니지만 시청률만큼 공정한 지표도 찾기 어렵다. 어느 정도 기대를 모았지만 배우 김태리는 여기서도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다. 나이가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데도 극 안에서는 누가 봐도 십대 소녀로 보인다는 점이 놀랍다. 워낙 동안인 탓도 있겠지만 행동이 크고 활어같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외모가 아니라 동작만 봐도 에너지가 넘치는 십대 소녀처럼 보이긴 한다.
정년이에 나오는 모든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주연인 김태리와 신예은의 연기가 특히나 좋다. 정년이와 영서 역할을 맡아서 피 튀기는 연기 대결을 보여주고 있는데 둘 다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놀라울 지경이다. 특히나 다소 차분한 영서 연기를 굉장히 매력적으로 소화하는 신예은에 대해서도 다시금 감탄했다.
생각해 보면 정년이는 남자 배우가 안 나온다.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비중이 높지 않다. 나온다고 하더라도 거의 다 악역이다. 정년이를 속여서 정년이의 엄마인 채공선을 불러 들이려고 하는 방송국 PD나 매란국극단의 재정을 맡았으나 도박에 돈을 탕진하는 등 별볼일 없고 인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 역할은 전부 남성이다. 누군가는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으나 실제로 여성의 삶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바로 남성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사회 뉴스 기사만 봐도 사귀던 여성으로부터 헤어짐을 통보 받고 여성은 물론 부모까지 해하려고 한 남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인생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리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여성들은 남성이 없는 상태에서 가장 행복하다.
정년이만 봐도 그런 지점이 잘 드러난다.
우정과 사랑은 물론 일에 있어서도 여성만 나와도 충분하다. 연극 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그러하다. 정년이 안에서 남성들은 정년이 아버지처럼 허무하게 전쟁 피난 중에 죽어 버리거나 여성을 이용해서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내 주변을 봐도 제대로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의 몫을 하는 사람보다 죽기 직전까지 부인과 딸들을 고생시키다가 가신 분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더 치졸한 건 부인이 자신보다 더 잘 나가거나 돈을 많이 벌면 남자들은 질투를 시작한다.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오스카 여우주연상이 이혼의 직행 티켓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이혼한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여성들이 대놓고 성공하고 잘 나가면 남자들은 이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기 보다는 질투하고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이다. 그래서일까. 정년이는 보면서 굉장히 편하다. 남자들이 악당으로만 나오지만 여성들을 결국 끌어 내리지 못할 게 너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에 매란국극단이 재정적인 문제를 맞이하긴 하겠으나 여성들은 이 역시 지혜롭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다.
여성들만이 나와서 사랑 이야기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의외로 설레이는 순간이 많다. 부용이 캐릭터가 안 나와서 여성들간의 사랑 이야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부용이 캐릭터까지 나왔으면 조금 과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을 정도로 사랑의 달달한 순간마저 제대로 전달해 주고 있다.
아마 너무 과했으면 탈주하는 사람이 많았을 거다.
연출과 연기 그리고 각본의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 들어간 드라마 정년이는 해외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 최근 한국 드라마 제작이 많이 줄어 들긴 하였으나 한국 드라마의 완성도는 미국이나 영국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걸 정년이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어쩌다 보니 일본이나 중국 드라마도 종종 보게 되는데 보면서 한숨이 나올 때가 있을 정도로 차이가 심각한 수준이긴 하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어차피 국내 시장은 좁다 보니 해외 시장을 노리기에 한국 드라마의 수준이 당연하게도 올라가고 있다. OTT가 다 좋다고 보긴 어려우나 글로벌 자본이 한국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인 것도 사실이기에 앞으로도 이를 제대로 이용해서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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